국민의 자동차 폭스바겐과 히틀러

728x90

 

국민의 자동차 폭스바겐과 히틀러

 

국민의 자동차
VolksWagen

 

포르쉐 박사가 자신의 설계 사무실을 차렸을 무렵, 한 야심만만한 사나이가 독일을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겠다며 큰소리 치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바로 공포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왼쪽, 포르쉐박사
오른쪽, 당시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

 

전쟁을 일으키기 전 그는 독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934 년 히틀러는 국민에게 뮌헨에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사랑하는 독일 국민여러분, 5년 안으로 모든 국민이 속도제한 없이 쌩쌩 달릴 수 있는 국민을 위한 국민자동차를 만들겠으며 또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위대한 독일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겠습니다!" 그로인해 장장 1,600km에 이르는 최고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아우토반 고속도로

 

또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인기를 모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이 아우토반 위를 달릴,전 국민의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1933년 8월, 드디어 히틀러는 자동차설계의 천재, 포르쉐 박사에게 부탁을 했다. 포르쉐 박사에게 전달된 히틀러의 친필이 적인 메모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1. 어른 두 명, 어린이 세 명 한 가족이 탈 수 있는 자동차
2. 650 kg 무게 이상 나가지 않게끔 작고 탄탄한 자동차
3. 연료 1 리터당 최소 10 KM 이상 달릴 수 있는 자동차
4. 최고 시속 100 KM 정도 달릴 수 있는 자동차
5. 자동차 가격은 천 마르크 미만의 비싸지 않은 자동차

 

그리고 또한 하지만 실내가 좁아서는 안 되고 차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추운 겨울에도 엔진은 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도 안 된다.

 

포르쉐는 히틀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오백 마르크 이하의 자동차는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 그건 당신이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당신은 만들기만 하시오, 차의 가격은 내가 정합니다."

 

 

그 말은 들은 포르쉐는 가슴이 뛰었다. 평범한 국민들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값싼 소형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포르쉐 박사의 오랜 꿈이 아니었던가!

 

히틀러의 모든 지원을 국가적 사업차원에서 강력한 지원을 받은 끝에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에게 우스꽝스러운 차를 선보인다. 무게를 줄이고 속도를 내기 위해서 자동차를 깎고 깎다보니 무당벌레 비슷하게 디자인이 탄생한 것이다.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딱정벌레 모양의 괴상한 차를 본 히틀러는 머리를 갸우뚱했으나, 70일 간의 성능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자 매우 흡족해했다. 얼마 후, 딱정벌레차를 만들 공장이 세워졌다.

 

이름은 이미 히틀러가 대중연설에서 약속한 대로 자동적으로 Volkswagen (폭스바겐 : 독일어로 국민자동차)으로 명명 되었다.

 

딱정벌레를 닮은 조그만 차를 처음 본 국민들은 모두 만족해했다. 국민들은 이 차를 폭스바겐 비틀 이라고 불렀다. 폭스바겐은 '국민자동차' 라는 뜻이고, 비틀은 '딱정벌레'라는 뜻이다.

 

최초의 딱정벌레차는 히틀러가 말했던 1천 마르크보다 100마르크가 더 싼 900마르크 이었다. 100km를달리는 데 기름은 겨우 7리터밖에 들지 않았으며, 다섯 사람이 탈 수 있는 조그만 세단이었다.

 

 

고장 없는 튼튼한 자동차!

 

예쁘고 깜찍한 다자인을 가진 자동차!

 

 

신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

 

 

 

오토바이 가격의 자동차!

 

결국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서 독일의 국민차로 생산되기 시작한 폭스바겐은 1978년 까지 약 2100 만대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금세기 최대의 WORLDWIDE BEST SELLING 자동차가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독재자 히틀러는 애인 에바와 함께 자살했다. 프랑스 군은 히틀러의 지시대로 폭스바겐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유로 포르쉐 박사를 체포했다. 포르쉐는 프랑스 사람들이 내뱉는 욕설과 돌팔매질을 받으며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폭스바겐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빛을 보지 못하고 고아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독일 국민들은 폭스바겐을 되살려 세계로 내보내는 길만이 그들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국민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폭스바겐을 만들기 시작했다.

 

1955년이 되자, 딱정벌레 모양의 깜찍한 모양의 자동차는 큰 인기를 얻고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딱정벌레차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었다. 히틀러는 독일을 망쳐 놓았으나 그가 만들어 낸 폭스바겐은독일을 잿더미에서 구했으니, 생각해 보면 독재자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준 셈이다.

 

하여튼 히틀러는 유태인 말살에도 광기를 부렸지만 독일인의 힘을 자부하기 위해 국민차 생산에도 광기를 부린 것은 확실했다. 이 국민차 폭스바겐의 개발은 독일을 짧은 시간에 경제대국을 일으켰다. 이젠 나치도 가고, 히틀러도 가고, 아픈 역사도 사라졌지만 오늘까지 그 강력한 국가 힘은 이 조그만 자동차 때문에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고 본다.

 

비틀의 긴 역사만큼 세계 방방곡곡 안 팔린 곳이 없는 만큼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이 조그만 자동차. 1가구 1차량을 실현시킨 이 조그만 자동차.

 

미국의 시골마을 동호회 모임에서조차도 그 낡은 차들에 애착을 가지고 진지하게차들을 살펴보는 이들 매니아들의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히틀러가 ' 이것 봐 .......나도 인류에게 공을 세웠잖아 ..........' 할까봐 재미난 겁이 나기도 한다.

 

"디자인은 어떻삼?""적절히 좋삼"

 

-----------다량발췌 : 지식즐[히틀러가 가장 성공한딱정벌레 폭스바겐의 신화]및 여러 싸이트 등!등!등!

 

 

 

 

 

한스 레드빈카 [ Hans Ledwinka ] 1878 - 1967 , 오스트리아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페르디난트 포르쉐(또는 포르쉐 박사)'라는 이름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고성능 스포츠카의 대명사 포르쉐의 이름이 비롯되었고, 그 유명한 폭스바겐 비틀을 디자인한 천재적인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간 또 다른 천재 디자이너인 '한스 레드빈카'라는 인물은 자동차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 익숙치는 않은 이름일 것 같다.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자동차 메이커에서 디자이너로 거의 일생을 보내며 당대 앞선 기술과 혁신적인 디자인의 모델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복잡한 동유럽의 역사적 배경과 그로 인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로 인해, 철의 장막 아래 공산 국가에 대해서는 냉담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나라 국민으로서는 그의 이름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스 레드빈카'라는 디자이너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경영자가 아닌 순수 개발자

 
프라지던트 제작 과정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에서 출생한 한스 레드빈카는 기술자인 삼촌 덕분에 기계에 친숙해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가 처음으로 자동차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은 19살 되던 해에 당시 마차 제작과 기차 부품 제작회사였던 네셀도르프(Nesseldorf)社에서 벤츠 모델을 기반으로 처음으로 자동차 제작을 시도한 프라지던트(Prasident) 프로젝트에 드로어(drawr)로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 중요한 역할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곧 드로어로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개발한 변속기의 성능이 기존의 것보다 훌륭한 것으로 인정되어 1901년부터는 회사의 자동차 파트를 전임하게 되었다. 비록 다음 해인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증기자동차 개발에 대한 관심으로 잠시 오스트리아에서 연구생활을 하긴 했지만,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동차와 관련하여 이런 중요한 책무를 맡은 그는 평생동안 자동차 개발자로서 살았다. 회사의 소유주나 경영자도 디자이너로서 그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자동차 생산에 관련된 모든 것은 그에게 전적으로 맡겼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철저한 개발자 입장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916년까지 네셀도르프에서 일하던 레드빈카는 그 무렵 회사에서 자동차 생산 공장을 더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원래 기차 업체였던 회사 입장에서는 기차 차량 시설을 더 만드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자동차 생산 공장에 들어갈 자본을 대신 써버리고 레드빈카와의 약속을 어겼다. 이에 대단히 화가 나 결국 그는 오스트리아의 스테이어(Steyr)社로 옮겨가 버리게 되는 일이 있었다. 자동차 개발을 경영보다 우선에 두는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개척자

1897년 그가 자동차에 처음 관여할 때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가 디자이너로 총괄한 회사는 체코의 네셀도르프, 오스트리아의 스테이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네셀도르프에서 이름이 바뀐 타트라이다. 이 중 스테이어는 경영진과의 불화로 1916년 네셀도르프에서 옮겨간 후 1921년 타트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짧은 기간 머물렀음을 생각해 볼 때, 거의 일생의 대부분을 한 회사에서 개발자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레드빈카가 이 회사들에서 했던 역할을 생각해 볼 때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각 회사의 첫 모델 디자인을 총괄한 개척자였다는 것이다. 1897년 네셀도르프의 첫 모델 프라지던트(이 모델은 총괄은 아니었음), 1920년 스테이어의 첫 모델 12/40 six, 1921년 타트라의 첫 모델 The Model Ⅱ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이 세 회사의 첫 모델들을 성공적으로 발표하여 각 회사들이 자동차 메이커로서 기반을 닦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때 그의 디자이너로서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절대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저한 디자이너

레드빈카가 뛰어난 능력을 인정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타고난 천재성도 있겠지만 그의 일하는 스타일이 그만큼 치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모델 개발 과정 중 나온 프로토타입에 기술적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가 풀릴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문제에 매달려 결국은 해결책을 찾아 냈고, 만약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프로젝트를 전부 처음으로 되돌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으로서 체코 회사인 네셀도르프와 타트라에서 근무하면서 전혀 체코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럼 어떻게 현지 직원들과 의사소통하면서 모델 개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소에 같은 팀으로 일하던 오스트리아인들을 체코에까지 데리고 와서 곁에 두고 함께 일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모든 설계도면에까지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체코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끝까지 국적만은 오스트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가 특별히 민족주의자였는지 아니면 그냥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국적을 바꾸기가 귀찮아서 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레드빈카의 대표적인 기술들

타트라 백본 섀시

그가 도입한 대표적인 기술들을 살펴 보자.
뒤에 얹은 공냉식 엔진, 튜브형 백본 섀시, 조인트리스 스윙 액슬, 변속기와 일체형 엔진 등이다. 그러나 각각의 기술을 모두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기술들을 한 자동차에서 구현하여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타트라 77

1934년 발표된 그의 대표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77은 공냉식 엔진을 뒤에 얹은 세계최초의 양산차라고 알려져 있다. 엔진을 뒤에 배치하여, 소음을 줄이고 승객석을 가로지르는 구동축을 없앰으로써 플로어 아래를 평평하게 하고 자동차의 노즈(nose: 자동차의 앞부분)를 짧게 함으로써 공기역학성을 좋게 할 수 있었다. 또한 77은 디자인적으로도 시대를 앞섰는데, 공기역학을 위해 뒤에 달린 상어 등지느러미 모양의 핀이 인상적이다. 87 역시 77의 뒤를 이어 거의 비슷한 디자인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레드빈카의 대표 모델이다. 그리고 당시 새로 건설된 아우토반에 걸맞는 자동차라고 인정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중 유일하게 계속 생산된 민수용 자동차이기도 하다.

레드빈카의 기술과 관련하여 동시대의 또 다른 천재 디자이너 페르디난트 포르쉐, 아돌프 히틀러와 얽힌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나치즘의 상징으로 독일을 통치하고 있었던 히틀러는 모터쇼에 다른 메이커 차를 보러 갔다가도 타트라 차만 보고 올 정도로 타트라 매니아였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히틀러는 독일 국민차의 디자인을 포르쉐 박사에게 맡겼다. 포르쉐 박사가 내놓은 모델(비틀)은 레드빈카의 디자인처럼 공냉식 엔진을 뒤에 얹은 것으로 스타일까지 비슷해 레드빈카의 디자인을 도용했다고도 하며, 1938년 독일의 체코 점령 이후 타트라 97은 비틀과 아주 유사해 생산을 금지 당했다.


서민적이고 실용적인 차를 디자인하고자 한 레드빈카

동시대 디자이너인 포르쉐 박사가 고성능의 스포츠카를 선호했다면, 레드빈카는 서민들이 이용하는 실용적인 소형차와 트럭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가 선보인 기술들은 승용차 뿐만 아니라 트럭에까지도 적용되었고, 아주 최근까지 그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트럭들이 체코에서 생산되었다.

한편 레드빈카는 자신의 나라도 아닌 이국(異國) 체코의 자동차 회사에서 거의 일생을 보내며 자동차 개발에 매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체코는 그가 독일군을 위해 군용차를 생산했다는 전범혐의를 인정해 6년간 투옥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자신이 헌신했던 국가로부터 배신 당한 레드빈카는 출감 후 다시 돌아오라는 타트라의 제의를 거절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자동차 디자인 스튜디오를 하고 있던 아들 에릭 레드빈카(Erich Ledwinka)에게로 가 죽을 때까지 자동차 디자인을 계속했다고 한다.

타트라가 공산국가였던 체코의 자동차 메이커였던 이유로, 그리고 스포츠카가 아니라 서민들을 위한 소형차와 트럭을 디자인한 이유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포르쉐 박사에 가려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한스 레드빈카는 지금이라도 다시 평가 받아야 할 천재적 디자이너일 것이다.